학생 인권: '흰 속옷만'...지나친 복장 규제가 사라지기까지

  • 김효정
  • BBC 코리아
여학생의 속옷이나 복장의 색상 등을 규제하는 학교 교칙이 점차 사라진다 (위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사진 출처, 뉴스1

'상의 안에는 반드시 속옷을 입는다' '-ㅁ 여중-

'지정된 블라우스와 흰색 계열의 속옷을 입는다' -ㅈ여중-

'속옷은 반드시 갖추어 입는다. (여름에는 러닝셔츠를 반드시 입는다)' -ㅈ여중-

이런 식으로 여학생의 속옷이나 복장의 색상 등을 규제하는 학교 교칙이 점차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교육청은 23일 교칙에 속옷 제한 규정이 있는 여자 중·고교 31개교를 대상으로 특별컨설팅을 진행한 결과 6개교가 속옷·양말 등의 색상 제한 규정을 삭제하거나 개정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25개교는 연말까지 교칙 변경에 나선다.

해당 학교들은 교복 착용 시 무늬 없는 흰색 속옷만 입도록 했다. 그 외에도 여름에는 살구색 스타킹에 흰색 양말을, 겨울에는 검정 스타킹에 검정 양말만 허용하는 식의 규정을 적용해왔다.

문장길 서울시의회 의원이 3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시내 여중 44개교 중 9곳(20.5%), 여고 85개교 중 22곳(25.9%)에서 복장 색상, 무늬, 비침 정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서울시 관내 여중 학교 규칙 중 속옷 관련 부분 발췌

사진 출처, 서울시 교육청

서울 외에도 강원도 원주에선 지난달 14일 모 여자 고등학교에서 이른바 '복장 검사'를 논란이 일었다.

교원들이 학생들을 일제히 의자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치마를 들치는 등 인권 침해적인 복장 검사를 했다는 것.

비판이 쏟아지자 강원도교육청은 해당 학교에 장학사를 파견해 실태 파악을 했다고 전했다. 학교장 역시 학생, 학부모, 시민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목소리

그동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도한 복장 제한은 꾸준히 문제 제기돼 왔다.

앞서 지난 5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지난 3월 15일부터 5월 12일까지 '우리 학교에 아직도 이런 복장 규제가 있어요!'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서울 55개 학교, 전국 152개 학교 초중고 학생들이 인권 침해적인 복장 규제를 고발했고 약 400건에 가까운 제보가 접수됐다.

여러 학교에서 여전히 두발·복장을 규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따르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벌점, 생활기록부 부정적 내용 기재 등 불이익을 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흰색 러닝셔츠를 입지 않으면, 속옷 미착용으로 보고 경고를 했다. 남교사가 교복 상의를 검사해 속옷 착용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모욕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아수나로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문제가 상세히 확인된 33개 학교에 대해서는 인권 침해 여부를 조사해달라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동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도한 복장 제한은 꾸준히 문제 제기돼 왔다(위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사진 출처, 뉴스1

청소년의 이러한 권리는 헌법 제 10조가 보장한다. 헌법 제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또 서울·경기·전북 등 지역의 교육청에서 제정한 학생인권조례도 이러한 내용을 보장한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 12조는 "학생은 복장·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두발 등 용모에 대해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청소년들과 사회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지난 6월부터 한 달여 간 해당 학교에 대한 컨설팅을 행했다.

이번 결과를 발표하면서 조희연 교육감은 "개성의 최고 실현 형태가 '인격'이라는 심리학자 융의 말처럼 인간은 개성을 실현할 권리가 부정되는 순간 인격의 손상으로 무기력해진다"며 "두발 자유, 편안한 교복, 속옷 규제 시정 등의 변화를 만들어 낸 것처럼 지속해 학칙의 인권침해요소를 개선하여 우리 학생들이 자유롭게 개성을 실현함으로써 존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교육기관의 규율과 통제가 강했던 한국'

학생들이 차별이나 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일부 교육청들이 학생 인권조례를 만들어서 시행한 지 이제 9년이 넘었다.

지난 3월에는 학생들의 두발·복장을 규제하는 학칙을 삭제하는 '학생인권조례안 개정안'이 서울시의회를 통과했지만, 학교 현장에서의 실행 여부는 미흡한 실정이다.

속옷이나 양말 규정 외에도 추운 겨울에 패딩을 겹쳐 입지 못하게 한다던가, 여학생들에게 치마 교복만을 강요하는 부분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에는 한 학생이 '학생인권 침해하는 용의 규정, 개정하도록 교육청이 나서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서울교육청 학생 청원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4월에 올라온 '학생인권 침해하는 용의 규정, 개정하도록 교육청이 나서주세요' 청원

사진 출처, 서울교육청 학생 청원

서울 소재 여고 재학생이라고 밝힌 이 학생은 "저는 아직도 외투 안에 갑갑한 마이(재킷)을 입어야 하며, 체육복을 입고 등하교하지 못해 불편한 교복을 입고 대중교통을 타느라 복통을 겪고, 줄무늬가 있는 양말을 신었다는 이유로, 조끼의 단추를 잠그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규제라고 쓰고 통제라고 읽는 규정들이, 학생을 하나의 자주적인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며 "두발과 복장, 용모의 자유는 학생을 넘어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며 이를 학교가 통제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육계에선 학생 생활지도를 위해 일부 복장·두발 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가 2019년 초·중·고 교원 787명을 대상으로 복장·두발 규제를 폐지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에 대한 입장을 물은 결과 응답자의 82.7%가 반대했다.

반대 이유로는 '생활지도 권한·범위 축소로 면학 분위기 훼손'(83.6%·544명)이 가장 많이 꼽혔다.

교총은 당시 입장문에서 "교육부 방안대로 시행령이 개정되면 학칙이 무력화된다"며 시행령 개정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교총은 "학생 생활지도 체계가 붕괴하고 학생들의 학습권도 침해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복장 규제와 관련된 갈등을 통제 사회에서 인권 담론이 확산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으로 진단했다.

경희대 사회학과 정고운 교수는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교육기관이 규율과 통제가 강했다"라면서 "학생들에게 자율권을 주면 질서가 무너지거나 학습 효율 및 성과를 저해하리라는 생각이 강해서 복장 규정도 엄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복장 규제 폐지는) 전 세계적으로 인권 담론의 확장 속에서 궤를 함께해야 하는 일이기에 학생들의 자기표현의 자유 및 의사 결정을 존중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라고 강조했다.